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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S

디자이너의 스승

없음

현대는 드높은 산과 드넓은 바다를 보면서

최상과 최고만을 추종하고 고속을 뛰어넘어 과속만 지향하고 있다.

성공을 향해 무턱대고 내달리고,

그렇게 해서 혹여 그 목적한 바를 쟁취했다 해도

그것이 꼭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는 숱하게 보아왔을 것이다.



박인학│발행인



우리에게는 여전히 한 해에 두 개의 신년이 존재한다. 하나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상의 신년인 설날이고, 다른 하나는 새해 달력이 알려주는 생활 속의 신년인 신정이다. 도시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양력 1월 1일을 신년으로 생각하고 고향의 나이든 어르신들은 아직도 음력 1월 1일이 진정한 신년이라 여기시지만, 신년에 대한 신구세대의 견해차를 떠나 새로 맞은 해의 첫날에 대한 나름대로의 크고 작은 희망과 다짐이 있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찬가지이다. 여하튼 신(新)도 결국 구(舊)가 됨은 만고불역의 진리이니, 묵은 활과 새 화살이라야만 명중한다는 뜻의 구궁신시(舊弓新矢)라는 옛말을 새기고 넘어가면 온당할 듯싶다.


신년이 되면 사람들은 먼 길을 마다 않고 명산을 향하거나 이름난 바다를 찾아 간절한 마음으로 떠오르는 새로운 한 해의 일출을 맞는다. 물론 발길을 되돌리면 지난 일 년 내내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든 저 도시 속에 이 한 몸을 다시 의탁해 산전수전을 치르며 살게 되겠지만, 그래도 첫 시작만은 자연 속에서 맞이하겠다는 자못 간절한 지성만은 하늘도 어여삐 받아주실 것 같다. 하늘로 솟구친 저 산꼭대기가 만고강산의 시발이고 하늘과 맞닿은 저 수평선이 망망대해의 끝자락이라 여기며, 떠오르는 붉은 해를 묵묵히 바라다본다.


길은 물의 흐름을 살피며 펼쳐놓은 인간의 모험적 야심이었고, 건축은 산의 치솟음을 올려다보며 본받은 인간들의 도전적 욕망이었다. 모든 길들이 대지를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 같고 모든 건축물들이 겹겹이 퍼져나간 산맥 같다면, 세상은 더없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모사일 게다. 하지만 우리의 길들은 떨어진 꽃잎이 따라 흐르기에는 너무 번잡하고, 오늘의 건축물들은 아지랑이와 같이 어울려 피어오르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 모든 물질문명이란 것들이 조물주가 만든 자연과 견주기에는 더없이 부족하기에, 오늘도 우리는 광대한 천연의 산천초목을 보며 호연지기의 새 마음이라도 받아들이려 해본다.


예로부터 바다는 청정의 상징이었다. 귀한 칠기의 도장을 위해서는 바람이 자는 날을 택해 깊은 바다로 배 저어나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붓질을 했다 한다. 또 산은 창조의 발원으로 여겨졌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대소사가 있으면 산중턱에 있는 산신각에 올라 갖은 정성을 다 바쳐 기도를 드리곤 했다. 즉 바다는 평정의 원천이었고, 산은 창의의 산실이었다. 어찌 보면 산과 바다는 일맥상통하다. 깊은 바다 속에는 높고 낮은 해산(海山)도 있고 해령(海嶺)과 해구(海丘)도 있으며, 산의 꼭대기부터 산골짜기를 따라 기슭에 이르기까지 물이 없는 곳은 없다. 바다가 전체 지구의 70% 이상이라 하지만 지면의 높고 낮음에 따라 물이 고이고 산이 드러났을 뿐, 결국은 하나로 이어진 천혜의 자연일 뿐이다. 산과 바다는 흙과 돌, 풀과 꽃과 나무, 그리고 뛰노는 짐승이나 헤엄치는 물고기가 다를 뿐이지 모든 생명체들이 먹고 살다 죽어 묻히는 한살이의 거처이다. 또 이와 단 한 치의 틈새도 없이 맞닿은 경계부터는, 모두가 하늘이다. 하늘은 높다 하고 땅은 낮다 하지만, 결국은 살을 맞대고 있는 한 덩어리인 것이다. 그 중에 인간이 발을 디디고 사는 곳이 땅이기에 우리는 산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든다.

왜 그 고생을 하며 산을 찾느냐고 물으면, 영국의 전설적인 산악인 조지 허버트 리 맬러리(George Herbert Leigh Mallory)가 했다고 알려진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웃으며 말하는 게 여느 산악인들의 즉답이다. 산을 대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단다. 하나는 등정주의(登頂主義)이고, 다른 하나는 등로주의(登路主義)로, 얼마나 높고 많은 산의 꼭대기를 정복하느냐, 또는 얼마나 어려운 루트를 이겨내며 산에 오르느냐를 우선시하는 게 그 차이란다. 어떤 방식이 더 지고한가의 차원이 아니라, 양자가 추구하는 의향이 다른 것이라 해야 하겠다.

지금은 울긋불긋한 등산복에 온갖 장비를 챙기고 오르는 걸 등산이라 말하지만, 죽장 하나를 들고 나선 우리 선조들의 심경은 입산이 근본이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꼭대기까지 오르겠다는 도전정신보다는 마음을 조아리고 마을 윗자락의 정자까지만 들어가 보겠다는 자연과의 융화정신이 우선이었으니,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한 마디는 이럴 수밖에 없었나 보다. “山影推不出月光掃還生, 산 그림자는 밀어도 나가지 않고 달빛은 쓸어도 다시 생기는구나…”


푸른 바다가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높은 파도와 드센 물결이 두려워 잔잔한 바다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이스라엘에는 갈릴리바다와 요단강과 사해가 한 줄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사해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이다. 더욱이 해수면에 비해 수면이 약 400미터나 낮은 사해는 물이 유입되어도 아래로 흘러내려갈 방도가 없기에, 고여진 물만 증발하고 염분은 고스란히 남게 되니 머지않아 결국은 소금밭이 되고 말 것이란다. 받기만 하고 주지 못하는 것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자연의 이치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산은 내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수양의 토대이고, 바다는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며 베풀어야 함을 가르치는 교훈의 기반이다. 산과 바다에게서 이 두 가지만 배운다면, 그저 받고 얻으려고만 버둥대던 우리에게 올 한 해가 그지없이 행복해질 게다.

우리 디자이너들은 산과 바다에서 광(光) 아래에 펼쳐지는 선(線)과 형(形)과 색(色)을 보며 농담, 비례, 강약, 반복, 질감, 변화 등의 원리를 배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과 사의 진리를 깨우친다. 우리가 하는 디자인이란 행위는 불변의 물적 고착에 불과하지만 자연이 보여주는 것은 단 한 번도 같은 순간 없이 이어지는 찰나들의 연계적 美이다. 어찌 보면 우리 다자이너들의 스승은 단지 저 하늘 아래의 산과 바다뿐이다.


그러나 현대는 드높은 산과 드넓은 바다를 보면서 최상과 최고만을 추종하고 고속을 뛰어넘어 과속만 지향하고 있다. 성공을 향해 무턱대고 내달리고, 그렇게 해서 혹여 그 목적한 바를 쟁취했다 해도 그것이 꼭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는 숱하게 보아왔을 것이다. ‘산 너머 산’이라고, 세계 최고봉이라는 에베레스트봉 외에는 막상 오르면 저 건너 산이 더 높아 보였고, 보이지는 않더라도 더 높고 높은 산들은 한도 끝도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도전과 응전만으로 점철된 일생을 살다 가는 것은 정녕 부질없는 자기 학대이다. 이젠 가는 길을 즐기자. 어쩌다 올랐다 해도 그 정상에서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더라.


“완벽하다는 것은 무엇 하나 덧붙일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린 왕자>로 유명한 소설가 생텍쥐페리가 남긴 말이다. 돌이켜 보니 내 살과 뼈, 머리와 마음에서 덜어내고 털어내야 할 것이 부지기수이다. 황금돼지의 해라며 금은보화로 채울 생각만 하지 말고, 혹여 콩 한 쪽이 생겨도 혼자 먹겠다고 욕심내지 말고 주변과 이웃들을 살피는 올 한 해가 되자.한 개의 촛불로 많은 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단다. 그게 바로,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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