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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오빠 조용필

없음

“기도하는~”이라는 조용필의 첫 마디는

마치 조건반사처럼

“오빠∼”란 함성으로 이어진다.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 봐 그런가 봐”

조용필의 히트곡 중 하나인 ‘고추잠자리’의 첫 소절이다.

내년이면 일흔이지만 ‘영원한 오빠 조용필’이기를

한 명의 팬으로서 바란다.

박인학│발행인


음악인 유희열은 가왕(歌王) 조용필의 데뷔50주년을 축하하는 유명인들의 축하 메시지 ‘50 & 50인’ 릴레이 영상을 통해, ‘조용필 선배님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보 같은 분이시자 대한민국의 음악교과서 같은 분’이라며, “조용필의 음악을 분석하다 보면, 편곡, 가사, 가창, 연주 등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댄서블하고 트렌디한 음악부터 발라드까지 모든 장르가 다 담겨 있는 음악인입니다. 지치지 마시고 음악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저희 후배 음악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시는지 모르실 것입니다.”며 존경의 뜻을 전했다.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 송산면 쌍정리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1968년부터 여러 그룹을 거치며 미8군 무대 등에서 무명생활을 보내다 1975년에 솔로로 전향하여 발표한 트로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977년 대마초파동으로 공백기를 갖기도 했지만, 1979년에 현재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가요계에 공식 데뷔하여 정규1집 음반을 발표한다. 1집 수록곡 ‘창밖의 여자’의 대성공을 기반으로 1980년대 최고의 히트메이커가 된 이후 진정한 가왕으로서 이제까지 총 19집의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조용필은 그의 노래를 듣고 불러준 대중에게 감사한다는 의미의 50주년기념 전국투어콘서트 ‘땡스 투 유(Thanks to You)’를 오는 5월 12일 서울을 시작으로, 5월 19일 대구, 6월 2일 광주에서 펼치는데, 이 기념공연의 티켓은 예매개시 10분 만에 전석이 매진되며 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과시했다.


조용필, 명실상부 가왕이라 한다. 왕… 무소불위의 지위를 가진 지존으로만 보일지 몰라도, 더없이 외롭고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리며 그 모두를 이겨내야만 하는 자리가 왕좌이다. 그는 그 자리에 걸맞게,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위용과 품격을 묵묵히 지켜왔다. 1993년 방송중단을 선언하고 나서 2011년 ‘나는 가수다’에 잠시 얼굴을 비친 이후 사상 처음 3주간으로 특별 편성된 내로라하는 후배들의 헌정기획 ‘불후의 명곡’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가수로서 이렇듯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 왔다는 것만 보아도 그의 깊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또한 그는 자신을 버림으로서 그의 위치를 더욱 견고히 했다. 싱어송라이터의 대부였으나, 그의 마지막 앨범인 19집에서는 새로운 조용필을 찾아내기 위해 과감히 남이 작곡한 곡을 받아들였다. 그 당시 전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싸이가 있었지만 그가 내놓은 ‘젠틀맨’은 결국 조용필의 ‘바운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기억도 난다.


‘창밖의 여자’로 한국의 첫 밀리언셀러 음반 가수가 된 조용필은 1994년에 음반 누적 판매량 1000만장의 기록도 한국 최초로 이룩하고, 국내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단독콘서트를 여는 등 그의 족적마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으며, 1986년에는 연말 ‘가수왕’을 사양하는 선언을 통해 한 걸음 불러서는 겸손함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또한 밴드 ‘위대한 탄생’과의 40년 가까운 동행도 다른 가수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같은 대중적 상업적 성공 외에도 그의 음악적 실험과 도전은 전통민요로부터 당대의 핫한 음악까지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꾸준한 시도를 다 해 왔음을 우리는 보아 왔다.


세상에 널리 퍼져 평판 높은 이름을 두고 우리는 명성을 얻다, 명성을 날리다, 명성을 떨치다, 라고 말한다. 영어로는 ‘fame’이나 ‘reputation’이지만 네임밸류(Name Value)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이름의 가치에 따라 한 사람의 사회적 인지도나 평가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또 팔고 사는 물건에 대한 소비자들의 일차적 판단기준이 되는 ‘브랜드(Brand)’의 어원은 가축 엉덩이에 달군 인두로 ‘내 것이요’라고 표기한 노르웨이의 고어 ‘Brandr, 불에 태우다’라는 추정이 가장 유력한데, 브랜드가 많지 않던 시절에는 그저 그것을 생산한 메이커(Maker)로만 식별하였으나 요즘은 제조사보다는 각 제품의 이미지에 의해 그 마케팅의 성패가 좌우되는 게 실상이다.

“제품은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데 반해 브랜드는 소비자에 의해 완성된다. 제품은 경쟁회사가 복제할 수 있지만 브랜드는 유일무이하다. 제품은 쉽사리 시대에 뒤떨어질 수 있지만 성공적인 브랜드는 영원하다.”는 미국의 유명작가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말처럼, 인간이든 사물이든 제 이름값을 해야 성공하는 무한경쟁의 세상이 되었다.


조용필은 그의 개인적 명성부터 브랜드까지를 잘 관리해 온 대표적 연예인이다. 중국에서는 100년 이상 된 상표를 두고 ‘라오쯔하오(老字号)’라 부르며 정부 차원에서 우대정책을 펴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1949년 신중국 수립 이후에 만들어져 50년을 상회하며 아직까지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전통 있는 노포(老鋪)들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백성은 음식을 하늘로 여긴다’ 하는 중국이기에 음식점도 적지 않으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1669년 창립을 자랑하는 퉁런탕(同仁堂 동인당), 100년이 넘도록 중국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칭따오맥주(靑岛啤酒)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말이 쉬워 50년이지, 두 세대를 넘어서는 반세기동안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 가수가 태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디자인의 생명은 그 제품의 생산이 멈추었거나 그 공간이 비록 부서졌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기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잔상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걸작도 간간히 있지만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졸작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서글픈 것은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조차 상기되지 않는 많은 디자인들일 것이다. 물론 뛰어나게 드러나 보이진 않지만 면면히 그 가치를 깊이 품고 있는 유구한 디자인이 최선도 최악도 아닌 최적일지도 모른다. 그리 본다면 우리 조용필의 애절한 목소리는 우리 민족의 감성과 사회적 정서에 가장 걸맞은 이 시대의 외침이었다.


“기도하는~”이라는 조용필의 첫 마디는 마치 조건반사처럼 “오빠∼”란 함성으로 이어진다.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 봐 그런가 봐” 조용필의 히트곡 중 하나인 ‘고추잠자리’의 첫 소절이다. 내년이면 일흔이지만 ‘영원한 오빠 조용필’이기를 한 명의 팬으로서 바란다.

그가 말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행복합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보답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엑소, 방탄소년단, 빅뱅 등을 보면 그 친구들이 왜 유명한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난 정말 다행입니다. 지금 태어났으면 안 됐죠. 비주얼적으로 절대 안 되기 때문에. 키도 작고. 요즘 애들은 너무 잘 생겼잖아요, 솔직히. 하지만 허락되는 날까지는 노래하겠습니다.”

조용필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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